30대에도 직장에서 퇴출당하는 시대에 일흔세살, 그것도 헤어디자이너 출신이 요리사 겸 식당주인으로 새인생을 시작한다. 또 남들은 기를 쓰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데 그는 서울 강남에 살다 굳이 경남 통영으로 내려가 태풍의 잔해가 남은 곳에서 중국식당 문을 열었다. ‘그레이스 리’란 이름의 할머니가 그 주인공이다.

“우연히 통영에 놀러왔는데 공기가 너무 좋고 바다풍경도 근사하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싱싱한 수산물이 가득해 반했어. 그날로 살 집은 계약했는데, 내 입에 맞는 식당이 없어서 직접 음식점을 연 거야. 잔머리를 굴린 것이 아니고 그저 마음가는 대로 한 거지”

아무 생각없이 연 ‘중국요리 이선생’이란 식당이 이달 중순 개업하자마자 손님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그는 지금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정말 그레이스답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1970년대 서울 도큐호텔에 미용실을 열어 단발커트와 헤어드라이어를 유행시킨 헤어디자이너이다. 세아이를 두고 미국으로 유학가서 폴 미첼 등에게 사사했고 ‘보그’ 등에 작품이 소개될 만큼 국제무대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지금도 그가 만져주지 않으면 머리를 하염없이 길러 쫑쫑 땋겠다며 충성을 맹세한 단골들을 위해 한달에 두번 정도 후배가 하는 미용실에 들러서 가위를 든다.

30여년을 바친 미용인생이지만 그가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 것은 음식. 미식가인 아버지로부터 미각을 물려받은 데다 취미 역시 세계 곳곳의 맛있는 식당을 찾아다니거나 직접 요리하는 것이다.

그동안 번 돈의 70%를 먹고 마시는 데 썼다는 것이 그의 고백. 그래서 서울 논현동에도 ‘슈슈’란 식당을 열었지만 아들에게 맡기고 서울에 사는 것이 싫어 통영으로 내려갔다. 상호를 짓는 것부터 인테리어, 종업원 구하기, 전단지 만들어 뿌리기 등을 그가 다 도맡았다.

매일 아침 시장에 나가 싱싱한 재료를 구입하고 새로운 메뉴 개발을 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머리에서 구상한 음식이 진짜 맛있게 만들어졌을 때의 기쁨과 희열은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만큼 짜릿하단다.

지난해 유방암 수술을 받았지만 삶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은 그 무서운 암세포조차 ‘죄송합니다’라며 꼬리를 내리고 떠나게 만들었다. 지금도 맛있다는 식당은 다 찾아다니고 영화와 공연장이나 전시장 관람도 빠뜨리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처럼 즐겁고 보람찬 일이 어딨어? 내가 돈이 많으면 공짜로 주겠지만 노후대책도 세워야 하니 돈받고 파는 거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행복감에 미소짓는 그레이스 리. 통영에서 갓 잡아올린 활어처럼 싱싱한 그에게 나이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글 유인경/사진 김정근기자 alice@kyunghyang.com〉기사제공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