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만에 찾아온 고향 통영의 첫 관문인 원문고개에 닿았다. 호수같던 북신만의 긴 바다는 간 곳 없고 새 시가지가 꽉 들어차 버렸다.

곧 바로 세병관을 찾았다. 언덕에서 내려다 본 통영의 바다는 곳곳이 메워져 좁아지고 50년전 옛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내가 어릴 때 공부하던 세병관은 그 위용을 떨치면서 그때 그 자리에 의연히 버티고 서 있었다. 내가 공부하던 초등학교 시절, 그 때는 일제식민지 때였다. 휴식시간 누가 썼는지 칠판에는 ‘독립만세’라고 백묵(분필)으로 선명하게 쓰여져 있었다.

어린이들 중 누가 그 위험한 글자를 썼을까. 한번도 아닌 여러 번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

비록 밖으로 터져 나오는 항쟁은 못했어도 통영인들의 마음속 독립운동은 들끓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통영’ 자체가 이순신 장군의 구국의 발자취다. 통영의 바다 육지 어느 한곳 장군의 숨결이 닿지 않는 곳이 있나.

이순신 장군을 영웅으로 받드는 것은 잘못이다. 영웅은 대체로 남의 영토를 빼앗아 정복하고 다스리는 승리자를 일컫는다. ‘알렉산더’ ‘징키스칸’ 등이 역사적 영웅이다.

이순신 장군은 그렇지가 않다. 왜군들이 불법으로 침입 국토를 유린하는데 이에 대항해서 나라를 지켜낸 위대한 구국의 화신이다. 민족의 삶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단화한 거룩한 인간이다.

이같이 그의 고결한 생명력, 깊은 감수성, 그리고 그것을 함부로 넘지 않은 이성의 신념이 다져져 있었기에 일본을 이길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정신세계는 더 연구되어야 하고 그의 인간성에 대해서도 더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 연유에서 일까. 통영사람들 다른 어떤 지역사람들보다 고집이 세다.

너무 자존심이 세다. 경우에 따라 그 자존심을 꺾을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나.

어쨌든 정부는 李충무공 정신을 계발하는데 더 구체적으로 차원 높은 작업을 해야 한다.
요즘처럼 이해득실에 매달려서는 안된다.

내 문학의 원천은 통영서 태어난 어린시절과 진주서 여학교를 다니면서 익힌 ‘구국정신’ ‘민란의 정신’에 있다.

‘통영’하면 구국의 고장이요, ‘진주’하면 민란을 배태 창출한 땅이다.

진주서 여학교 다닐 때 ‘봉황대’쪽에 일본천황을 모신 신사가 있었다. 밤새 그곳에 똥을 무더기로 싸놓은 걸 봤다. 이것은 일제에 대한 항거다.

내가 통영서 서울로 갈 때 윤선을 타고 부산을 가서 거기서 기차를 다시 타고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나는 시덥잖은 원고료로 못먹고 살아 회사원생활도 했다. 서울살이는 그야말로 ‘생존투쟁의 장’이었다.

나이 65살에 ‘토지’를 끝내고 69살에 ‘토지문학관’을 짓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마무리가 된지 꼭 10년만에 고향을 찾아왔다.

그 동안 고향만 못찾아온 것이 아니다.
v 뜻있는 사람들이 중국동북쪽(북간도) 땅을 빌려 사업을 계획하는데 나도 참여했다. 그때 처음 타보는 비행기로 간 것이 외출도 처음이었다.

또 내가 산 원주땅이 토지공사에 편입되어 그 관계를 해결하는데 많은 시련과 시일을 소비했다. ‘토지문학관’은 이제 겨우 완성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어머니는 내가 처녀때 통영말로 ‘구멍지기’라고 했다. 하도 밖을 나가지 않고 방구석에서 책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시집간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자 이웃들이 ‘그 집에 처녀가 있었던가’라고 고개를 갸웃둥거렸다.

얼굴이 붉어져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못했다. 그러던 내가 서울살이 50년만에 찾아오다니, 고향이 그렇게 멀었던가 생각해 본다.

다시 말하지만 ‘통영’하면 이순신 장군의 혼이 깃든 곳이다. 만약 임진왜란이 없었더라면 장군은 평범한 관리나 군대의 전략가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대단한 예술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평생 개인의 명예욕에서 완전히 벗어난 어른이었다.

지금 세병관이 그처럼 웅장한 기상으로 버티고 선 자태에 눈물이 났다.

그보다 더 큰 서울의 궁궐보다 그 모습이 더 크게 다가왔으니 통영인의 기상은 영원할 것이다.


- 본 글은 2004년 11월 5일, 50년만에 고향 통영을 찾은 소설가 박경리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